지정학적으로 반도에 위치한 우리나라에 있어 바다는 과거부터 단순한 놀이공간, 삶의 터전 이상의 의미를 지녀왔다. 특히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의 3대 해전인 한산, 명량, 노량 해전과 1950년 6.25전쟁을 종전시킨 인천상륙작전은 우리나라 연안의 특성을 이용,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공격해 불리한 전세를 역전,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연안은 국가 안보와 직결되는 매우 중요하고 민감한 사안이며, 각 나라들은 이러한 연안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를 국가 차원에서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카보타지(Cabotage)제도를 운영, 자국 연안을 관리하고 있다.
이 제도를 시행 중인 중국과 일본은 자국적선에게만 연안 운송을 허용하고 있으며 미국의 경우는 이에 한 발 짝 더 나가 자국 선원이 승선하여야 한다는 조건을 덧붙여 엄격하게 카보타지를 적용하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해양부의 ‘내항화물운송사업자의 외국적 선박 용선제한에 관한 고시’로 카보타지를 시행 중에 있으나 실상은 자국적선 보호는 커녕 외국적선의 운항을 조장하는 유명무실한 제도로 전락해버렸다는 것이 국내 연안 운송업자의 주장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시행 중인 ‘내항화물운송사업자의 외국적 선박 용선제한에 관한 고시’가 국적취득조건부나용선(BBCHP)에 대해서는 예외 조항으로 분류되며 사실상 외국적선박의 내항 운송을 허용, 자국 선사를 보호하는 카보타지의 본래 목적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국적취득조건부나용선은 국적을 취득하기 전까지는 외국적선이므로 통관세, 등록세, 취득세를 포함한 세금이 면제, 서비스 비용 측면에서 모든 세금을 지불한 우리나라 국적의 내항용 선박 가격 경쟁력이 크게 떨어진다는 것이다. 일례로 우리나라 연안 운송업자가 선박 수입 시 납부하는 총 제세공과금은 11,000톤 급 시멘트 선박 기준 약 4억원이며, 수입한 선박을 한국 선급에 등록하는 비용까지 포함하면 약 5억원의 비용을 납부하게 된다. 하지만 외국적선인 국적취득조건부나용선은 세금부과 및 한국 선급 등록대상에서 제외되어 국내 연안 운송업자보다 낮은 운임을 제공할 수 있다.
또 다른 문제는 이러한 제도의 허점을 악용하는 대량화주이다. 실례로, 연안 해송 업체인 T사는 국내 대형 시멘트 업체와 장기기간용선 물량 운반을 목적으로 12,000톤급 선박을 수입 후 시멘트 전용선으로 개조수리를 마치고 정식 취항을 기다렸으나 급작스런 화주의 인수자 변경으로 장기계선 될 위기에 처해 있다.
이처럼 계약 체결 뒤 운송업자가 모든 절차를 마친 상황에서 대량 화주가 운송업자를 변경해도 선사는 손 쓸 도리 없이 장기계선 및 손해를 고스란히 떠안아야 할 수 밖에 없다. 실제로 선박 수입, 개조 및 수리에 드는 비용 및 세금은 11,000톤 급 선박을 시멘트 선박으로 개조 기준 구매비 약 60억 원, 개조수리비 약 77억 원, 그리고 수입통관비 및 취등록세 등을 포함한 제세공과금 약 4억원을 포함, 총 141억 여 원이 소요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량화주의 횡포로 갑작스럽게 계약이 파기될 시 국내 운송업자가 입을 피해액의 규모는 업체를 존망의 기로에 서게 할 정도로 클 수 밖에 없다.
현 고시의 맹점을 악용하는 이는 비단 대량화주만이 아니다. 외항부정기사업자가 지방청에 내항화물운송사업자 면허를 신청해 외국적선을 국적취득조건부나용선으로 만들어 연안 운송에 이용하는 사례 또한 발견되어 선의의 선사가 또 다시 피해를 입는 상황이 초래될 수 있다는 것이 관련 업계의 입장이다. 세계 경제 불황이 장기화되며 상황이 좋지 않은 외항업계에 비해 안정적인 내항 운송업계에 외항 운송업자들이 눈독을 들이도록 조장하는 것이 현 고시라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내항화물운송사업자의 외국적 선박 용선제한에 관한 고시’의 제 2조 1항이 개정되지 않는다면 굳이 비용과 시간을 추가로 감수하면서까지 한국적으로 변경 등기 및 등록하는 연안 운송업자는 없을 것이다. 아울러 외국계 자본을 투자 받은 국적취득조건부나용선의 연안 운송업으로의 진출이 용이하게 되어 단기적으로는 자국적 선사의 금전적 손실을, 장기적으로는 연안 운송업 경쟁력 약화 및 국부 유출을 야기할 것이라는 게 관련 업계 종사자의 지적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현 고시의 제 2조 1항의 ‘국적취득조건부나용선’이 제 2조 3항에 따라 지방해양항만청장의 허가를 받은 경우에만 운항을 할 수 있도록 개정되어야 한다는 것이 국내 연안 해송업자의 주장이다.
하지만 계속되는 문제 제기 및 해결책 요청에도 해양부 및 관련 기관의 반응은 전무한 실정이다.
각 국가들이 자국의 연안 및 연안 운송업자를 보호하는 제도인 카보타지를 시행하는 이유는 자국운송사업자의 생존권 보장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연안운송을 통해 운송되는 화물의 종류가 석유, 시멘트, 철강제품, 모래 등 국가 기간 사업에 반드시 필요한 전략물자이기 때문에 국가 비상 상황 시 이러한 물자들을 운송하는 자국선사가 없을 때 초래되는 상황들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수단이 바로 카보타지인 것이다.
특히 휴전중인 우리나라의 경우 전쟁 발발 시 전쟁물자의 원활한 수송과 복구 지원 물자를 운송하는 역할을 현재 연안 운송업자들이 수행한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국내 연안운송이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철도운송의 한계를 보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연안운송이 철도운송보다 장거리 및 대량화물을 운송하는 데 유리하며, 경부축 중심의 구축 및 미흡한 연계운송체계를 가진 우리나라 철도운송의 문제점을 연안운송이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국기의 선박으로만 연안무역이 행해져야 한다는 제한사항, 자국 연안운송사업자를 보호하기 위한 제도’인 카보타지의 본래 역할과 상충되는 현 고시가 개정되지 않는다면, 외국적선이 우리 연안을 차지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외국적 선박들이 점령한 우리 연안에서 제 2의 명량 대첩, 제 2의 인천상륙작전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 자명하다. 자국적 선사 보호와 국익을 보존하기 위한 관련 부처의 대비책 마련이 절실한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