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나라 입장에서 해운은 국가 기간산업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우리나라 수출입 화물의 99% 이상(중량 기준)이 바다를 통해 운송됨을 감안하면, 해운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정도다. 실제로 국내 해운업계는 수출 일선을 지켜오면서, 한국이 세계 5위의 해운강국으로 우뚝 섰다며 축포를 쏘아 올리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그러나 현재 한국 해운산업은 침몰 위기에 빠진 상태다.
국내 3위 해운기업 STX팬오션이 법정관리를 신청한 데 이어 1위와 2위 해운회사도 경영난을 겪는 처지다. 정부의 정책적 지원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줄도산’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고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국내 해운산업이 위기에 빠지게 된 원인으로는 2008년부터 시작된 글로벌 경제위기에 따른 해운경기 위축이 첫 손가락에 꼽힌다. 국적선사들의 위기관리 능력이 허약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얼마 전부턴 해운선진국에 견줘 우리 정부의 지원이 부족하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정책적 지원 절실한 상황
침몰 위기에 빠진 국내 해운산업을 살리려면 정부의 정책적 지원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게 해운업계의 분위기다. 해운노동자들까지 해운업 위기 돌파를 위한 정책적 지원을 호소할 정도로 위기감이 고조된 상태다. 전국해상산업노동조합연맹(해상노련)은 지난달 15일 긴급 의장단회의를 열고, 정부 당국의 해운금융지원 대책 마련을 포함해 “요구조건이 모두 수용될 때까지 강력히 투쟁할 것을 결의했다”고 밝혔다. 해상노련은 이어 10월 18일부터 22일까지 주요 일간지에 해운·수산업 지원을 호소하는 호소문(광고)을 내기도 했다.
10월 21일자 한 중앙일간지에 실린 호소문에서 해상노련은 “최근 가속화되고 있는 해운사의 경영위기 및 일본 원전피해로 인한 수산물 파동과 관련하여. 10만여 선원과 그 가족들이 심각한 고용불안으로 삶을 위협받고 있어, 전 조합원을 대표하여 정부 및 관련 기관에 해운·수산업 위기 돌파를 위한 정책적 지원을 호소한다”고 밝혔다. 해운업에 대해선 “2008년 9월 미국발 금융위기로 시작된 불황으로 최근 3년 사이 70여개 선사가 도산하거나 10여개 선사가 법정관리 중이며, 많은 선사들이 여전히 심각한 유동성 부족을 겪고 있다”고 해상노련은 주장했다.
해상노련은 “특히 우리나라 5대선사였던 대한해운과 STX팬오션 마저도 불황의 여파를 이겨내지 못해 법정관리에 들어가는 등 해운산업의 근간이 뿌리채 흔들리고 있다”며 “이로 인해 선원들은 세계 각 곳에서 선박 내 억류나 임금 체불, 고용 불안정 등으로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전했다. 이처럼 국내 해운업 전체가 심각한 위기에 빠졌음에도 우리 정부의 대응은 허술하다는 게 해상노련의 주장이다. 전 세계적인 해운위기를 조기에 극복하기 위해 외국 정부와 금융권은 지원을 아끼지 않지만 “(우리) 정부의 대책은 공허하기만 하다”는 것이다. 외국 정부의 해운업 지원 사례로 해상노련은 중국·덴마크·독일을 꼽았다.
해상노련에 따르면, 중국 정부는 국영선사인 코스코(COSCO)에 108억 달러나 되는 신용을 제공했다. 중국수출입은행도 코스코와 또다른 국영선사 차이나쉬핑(CSCL)에 5년간 95억 달러를 지원하기로 결정한 바 있다. 덴마크 정부는 머스크(Maersk)에 대한 65억 달러의 금융차입을 주선했다. 독일 정부도 하팍-로이드(Hapag-Lloyd)에 18억 달러의 지급보증을 지원했다. 문제는 중국·덴마크·독일 정부가 지원한 4개 해운기업 모두 세계 10위 안에 드는 컨테이너 선사들이었다는 것이다. 올해 6월 16일 기준 4개 해운기업의 선복량 순위는 머스크 1위(260만6303TEU), 코스코 5위(76만8461TEU), 하팍-로이드 6위(71만3420TEU), 차이나쉬핑 9위(60만1631TEU)였다. 한국의 한진해운은 지난해 3월 9위에서 7위로 2단계 올라 차이나쉬핑(지난해 8위)을 앞질렀다. 그러나 한진해운의 선복량(62만4728TEU)은 차이나쉬핑을 근소하게 앞선 반면, 6위 하팍-로이드에겐 크게 뒤졌다.
한국 금융기관은 역차별
세계 최대 해운기업인 머스크는 덴마크 정부가 주선한 차입금 65억 달러를 활용해 1만8000TEU급 세계 최대 친환경 컨테이너선 20척을 발주하는 등 경쟁력을 높일 수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반면 국내 해운업계는 정부의 실효성 있는 지원이 아쉽다고 불만을 표시한다. 우리 정부도 해운업 지원 정책을 내놓았지만 대부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는 불만이다. 이와 관련해 해상노련은 “우리나라는 캠코선박펀드, P-CBO, 선박금융공사, 해운보증기금 등 몇 가지 정책이 발표되긴 하였으나, 결실을 맺지 못하거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꼬집었다.
또 해상노련은 큰 기대를 걸었던 박근혜 대통령의 해운업 지원 공약이 불합리한 이유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는 주장을 폈다. 박 대통령이 지난해 대선 때 공약한 ‘해운업계 유동성 지원을 위한 선박금융공사 설립’에 대해 “금융위원회가 WTO 보조금 규정 위반 가능성을 이유로 사실상 설립을 무산시켰으며, 해양수산부가 제안한 해운보증기금 또한 보류상태에 있다”고 해상노련은 전했다. 하지만 해상노련은 “많은 전문가들이 통상마찰의 여지가 없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의 정부는 해운위기에 대응하여 자국의 해운기업에 직접적인 지원을 아무 문제없이 하고 있다”고 밝혔다.
더구나 우리나라 금융기관들이 국적선사를 지원하지 않고 외국 해운기업을 지원하는 역차별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해상노련은 주장했다. “국내 해운기업은 새로운 투자는커녕 유동성 확보에 전력을 쏟고 있는데, 많은 외국의 경쟁기업은 (자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위기를 극복하고, 경기회복에 대비하여 우리나라 금융기관의 지원을 받아서 적극적으로 선박건조에 나서고 있는 것”이란 설명이다. 외국 해운기업을 지원했다고 해상노련이 지적한 국내 금융기관은 수출입은행과 한국무역보험공사다. 해상노련에 따르면 수출입은행은 머스크에 선박금융자금 1조3000억원(12억 달러)을, 미국 선사인 스콜피오탱커스에겐 1300억원(1억2000만 달러)의 선박채권보증을 지원했다. 무역보험공사도 칠레의 컨테이너선사인 CSAV에게 1800억원(1억7000만 달러) 무역보험을 제공했다.
신문 광고를 통해 “모두가 해운산업에 대한 금융지원은 타이밍이 중요하다고 한다”면서 “적기에 실질적으로 금융지원이 이루어지도록 금융정책당국과 정책금융기관 등 전 금융기관이 적극 나서주길 호소”한 해상노련은 해수부 장관한테도 정책적 지원을 요구했다. 10월 30일자 <부산일보>에 따르면, 이중환 해상노련 위원장은 지난달 28일 열린 윤진숙 해수부 장관과 가진 간담회에서 “선박금융공사 설립이나 해운보증기금 제도를 시행하는 등 적기에 실질적 금융지원이 이뤄질 수 있도록 정책적 지원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우리나라 해운업은 고사할 수밖에 없다”고 호소했다. 이에 대해 윤 장관은 “해운업계 유동성 지원을 위해 금융업계와 접촉해 영구채 발행을 추진하고 있으며 해운보증기금 역시 해수부가 적극 나서고 있다”고 밝혔다고 한다.
구조적 취약점 극복 과제
국적선사들의 위기관리능력 부족도 한국 해운업의 침몰 위기를 부르는 데 한몫했다는 지적이다. 이는 해운선진국과 견줬을 때 한국 해운업의 구조가 취약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전문가들은 해운업을 ‘궁핍과 잔치의 산업’이라고 정의한다. 해운경기의 사이클이 장기 불황과 단기 호황이 이어진다는 뜻이다. 또 불황과 호황의 격차가 극심하다는 것도 해운업의 특징으로 꼽힌다. 이 때문에 과거 해운기업 사이에선 “짧은 호황기를 잘 활용해야 성공한다”는 게 정설로 통했다. 경영환경이 달라진 오늘날에도 해운업계에선 짧은 호황기에 큰 이익을 거둬서 긴 불황기를 버텨야 한다는 인식이 강하다.
현재 세계 해운시장은 긴 불황의 터널을 지나고 있는 상황이다. 앞으로도 상당한 시간이 지나야 회복될 것으로 보인다. 김우호 해양수산개발원 해운물류연구본부장은 지난 1월 25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 국제회의실에서 열린 2013 해운·물류 전망대회에서 “부정적인 시장 분위기로 선박금융시장 역시 위축되어 해운위기가 장기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당시 그는 ▲선박공급 과잉 구조화 ▲역사상 최저 운임수준 ▲고유가로 인한 손실 확대를 세계 해운시장 실태로 꼽았다. 그는 특히 강화되는 환경규제에 대응하고 늘어나는 연료비 부담을 줄이기 위해 세계 상위권 해운기업들이 낮은 선가를 이용해 에너지 효율이 높은 녹색선박을 대량 발주할 경우 세계 해운시황이 회복되기까지 오래 걸릴 우려가 있다고 했다. 2011년 머스크가 1만8000TEU급 친환경 컨테이너선을 대량 발주한 사례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김 본부장은 또 “내년 초까지 선박 과잉공급 상황이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고도 했다.
김 본부장의 예상처럼 세계 해운불황이 장기화될 경우 이를 버텨내야만 다시 호황기를 맞을 수 있다. 긴 불황기를 버티려면 위기관리능력이 뛰어나야 하는데, 국내 해운기업들은 그런 평가를 받지 못한다. 최영석 해양수산개발원 전문연구원은 <해운과경영> 제13호(2009년 12월 해양수산개발원 발행)에 실린 ‘해운산업 위기대처 방안:역사적 사례와 시사점’을 통해 우리 해운기업들은 “불황기에 상대적으로 취약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고 짚었다. 그는 1980년 중반 해운불황기 사업다각화에 주력한 일본 NYK(Nippon Yusen Kabushiki Kaisha)와 유조선시장에 처음으로 풀(pool) 제도를 도입한 덴마크 톰(Torm)사 등을 사례로 들면서, “해운 불황기인 저운임시기에 생존하고 경영 및 사업 안정화를 위해 다양한 방안이 강구되었다”고 설명했다. 특히 “선진 해운국은 신조선 등 선박을 미리 확보하여 해운산업의 주기변화에 따른 불황여파가 상대적으로 미미했으나, 우리나라 선사는 호황기에 고가의 신조선 발주 확대 및 중고선 대량 매입 등으로 구조적으로 해운불황에 취약하다”고 최 연구원은 분석했다.
해운기업은 ‘장기 불황과 단기 호황이 순환’하는 해운업의 특성을 파악하고, 대응하는 게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 국적선사들은 운임수입 비중이 너무 높은 탓에 불황기가 길어지면 유동성 위기를 겪을 수밖에 없다. 국내 1위 해운기업인 한진해운이 최근 같은 그룹 계열사인 대항항공으로부터 긴급 지원을 받아야 했던 이유다. 2위 현대상선도 자산매각, 유상증자 등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두 기업 모두 급한 불은 끌 수 있을 전망이다. 그러나 정부의 지원과 함께 해운기업들의 자체 노력이 필요하다. 불황기마다 정부의 지원에 기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불황에도 지속 가능한 경영이 이뤄져야 한다. 이와 관련해 김우호 본부장은 “해운경기 순환변동에 능동적으로 대응하여 적기 투자를 강화”하고, “극심한 불황 및 저성장에도 지속 경영이 가능한 리스크 분산형 해운산업 체계 구축”이 필요하다고 밝힌 바 있다.
글. 이주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