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어난 항해술과 모험 정신으로 이름을 떨친 해상 민족이 있다. 중세 유럽을 좌지우지했던 바이킹이다. 북유럽 스칸디나비아 반도가 근거지였던 바이킹은 한 때 유럽의 바다를 지배했다. 오늘날엔 노르웨이·덴마크·스웨덴·아이슬란드 4개국이 바이킹의 후예를 자처하고 있다. 4개국 가운데 노르웨이·덴마크·스웨덴은 선진해운그룹(CSG) 회원국이다. 특히 덴마크는 ‘글로벌 해운 불황’에도 끄떡없는 세계 최대 해운기업을 보유한 해운 선진국으로 손꼽힌다. 해운을 핵심 산업으로 육성한 덕분이다.
‘해운중심국가’ 건설 목표 동화작가 안데르센의 고향(오덴세) 또는 낙농 선진국으로 이름난 덴마크는 북해와 발트해 사이로 튀어나온 이윌란(독일어 유틀란트) 반도 북부와 400개가 넘는 섬으로 이뤄졌다. 오늘날 덴마크는 인구 약 550만명, 면적 4만3094㎢에 불과한 작은 왕국이지만, 과거엔 노르웨이, 스웨덴, 아이슬란드 등을 다스렸다. 이윌란 반도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바이킹은 영국 북부를 점령하고, 지중해 연안까지 진출했을 만큼 위세를 떨쳤다. 배를 짓고 모는 조선술과 항해술이 뛰어났기 때문인데, 바이킹 후예인 덴마크인들은 해운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발전시켰다.
덴마크는 현재 세계 해운시장을 주도하면서, 녹색해운에 앞장서고 있다. 해운산업 육성에 힘을 기울인 결과다. 덴마크 해운산업은 글로벌 해운 불황을 극복할 수 있을 정도로 경쟁력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국해양수산개발원(KMI)이 2009년 12월 펴낸 <해운과경영> 제13호에서 최영석 연구원은 “1980년대 이후 덴마크가 해운 불황을 극복할 수 있었던 요인은 크게 머스크(Maersk)의 주도적 역할, 클러스터 효과(코펜하겐) ,정부의 제도적 지원 등이다”라며 ‘덴마크의 해운산업클러스터 육성정책’에 대해 설명했다. 최 연구원에 따르면, 덴마크 정부는 1996년 해운클러스터 조성을 공식 발표했다. 외국의 해운 기업과 전문 인력을 적극 유치해 ‘글로벌 해운 중심 국가’를 건설하기 위함이었다.
덴마크 정부는 선택과 집중을 통해 클러스터 효과를 높인다는 방침을 세우고 해운관련 산업을 육성했다. 최 연구원은 “핵심산업, 관련산업, 보조산업, 지원기구로 분류하여 체계적으로 관리·지원·육성하는 방안이 모색되었다”면서, 덴마크의 해운클러스터 모델은 독일, 노르웨이, 영국 등이 벤치마킹하는 등 “세계적으로 성공한 유럽의 전형적 사례로 평가된다”고 밝혔다. 그는 덴마크 정부가 “제2선적제도(DIS) 등의 제도적 지원을 통해 클러스터 효과를 제고하여 해운산업을 국가 중심산업으로 발전시켜 블루 덴마크(Blue Denmark)를 구현하고 있다”고도 짚었다. 조선소, 선용품공급, 선박관리 등 해운산업클러스터로 조성된 덴마크 수도 코펜하겐은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해운금융 자본 유입을 촉진시키고, 유럽 최고 수준의 선박운항 및 해운 보조 서비스 환경을 제공”하기 위한 방안이 마련됐다. 코펜하겐은 석유화물 교역의 중심지이자 세계 최대 컨테이너 선사인 머스크라인을 비롯한 주요 선사들의 본사가 위치한 곳이기도 하다. 덴마크의 주요 선사들은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선박 운영·관리의 전문화를 위해 해외 선사들과 제휴를 확대했다. 유조선 시장에 처음으로 풀(pool) 제도를 도입한 톰(Torm)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 유조선사는 세계 주요 선사들과 풀을 형성하면서 선대를 확장할 수 있었다.
녹색선박기자재 사업 지원 덴마크는 ‘녹색성장’ 정책을 펴고 있다. 덴마크 정부는 세계 최초의 녹색성장 국가를 이루기 위해 오는 2050년까지 화석연료 사용으로부터 독립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해운산업과 관련해선 ‘친환경 선박’을 개발 중이다. 선박기자재 산업이 발달한 덴마크에서 2008년 시작된 ‘미래녹색선박(Green Ship of the Future)’은 녹색선박 연구를 통해 환경 부담을 줄이려는 프로젝트다. 친환경 해운이란 트렌드에 대응하기 위한 이 프로젝트의 주축은 알보그 산업(Aalborg Industries), 에이피 몰러 머스크(A.P. Moller-Maersk) 그룹, 만디젤(MAN Diesel), 오덴세 조선소(Odense Steel Shipyard) 등 덴마크의 대표적 해운·조선 관련 기업이다.
KMI에 따르면, 미래녹색선박 프로젝트는 기계설비, 추진 장치, 운영, 물류 등 4가지 부문에 걸쳐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목표는 신조선과 현존선을 포함해 이산화탄소(CO2) 배출량 30% 절감, 황산화물(SOx)과 질소산화물(NOx) 배출량은 90%씩 절감이다. 덴마크의 해운·선박 관련 기업뿐 아니라 대학과 기술연구소도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이들은 먼저 ‘오염물질 배출저감 선박 개념 연구’를 공동 수행하기로 2009년 합의한 바 있다. 덴마크 해양청과 조선기자재협회, 조선협회, 선주협회 등은 협력기관으로 이 프로젝트 활동과 홍보를 지원한다.
프로젝트 참여주체들이 합의한 오염물질 배출저감 선박 개념 연구의 목적은 신조선을 건조할 때 채택할 수 있는 다양한 방안과 하위프로젝트 성과를 종합 검토하는 것이다. 오염물질 저배출 선박(Low Emission Ships)의 주요 기술은 프로펠러 구조개선, 스피드 노즐), 배기가스 재순환 시스템(EGR), LNG 보조엔진, 선체 페인트, 폐열회수 시스템, WIF(Water in Fuel) 시스템, 배기가스 세정장치, 펌프와 냉각수 최적화 등 9가지로 이뤄졌다. 연구 대상은 8500TEU급 컨테이너선과 3만5000DWT 핸디사이즈 벌크선이다. 연구 결과 녹색 컨테이너 선박은 일반선박보다 건조비용이 약 10% 더 들지만 질소산화물과 황산화물 배출량 절감 목표를 거의 달성했다고 한다. 다만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목표에 미치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조선기자재 업체와 조선소, 선사가 참여하는 덴마크의 미래녹색선박 프로젝트는 관련 기자재 개발 이후 상용화를 목표로 한다. 향후 세계 해운시장의 핵심 경쟁력으로 전문가들은 친환경 선대를 얼마나 더 많이 확보하느냐를 꼽는다. 온실가스(GHG) 배출규제 협약, 선박재활용 협약, 선박 평형수 관리 협약 등 국제해사기구(IMO)가 추진하는 각종 환경규제에 대응하려면 녹색선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높아진 연료비 부담을 줄이기 위해 에너지 효율이 높은 선박에 대한 수요도 늘고 있다. 덴마크의 녹색선박 기자재 개발은 이러한 미래 해운시장을 주도하려는 포석으로 읽힌다.
세계 1위 해운사의 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국내외 해운시장은 장기 불황을 겪고 있다. 선박 공급 과잉과 운임 하락, 고유가 등이 세계 해운기업들을 압박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해운업계에선 이대로 가다간 ‘공멸할 수 있다’는 분위기까지 확산되고 있다. 최근 4년 동안 문을 닫거나 등록 취소된 국내 해운기업이 70개가 넘는 것으로 집계됐다. 한진해운이나 현대상선 같은 대형 선사도 2011년 3분기 이후 적자가 누적되면서 어려움에 빠진 형편이다. 선복량 기준 세계 5위이자 수출입화물의 99% 이상을 해상으로 수송하는 우리나라 처지에서 해운은 국가기간산업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해운산업의 내실을 다지는 데 소홀했다는 지적과 함께 정부의 신속한 지원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공멸 위기’를 겪는 우리나라 해운기업들과 달리 불황을 이기면서 꾸준히 수익을 내는 해운기업도 적지 않다. 대표적인 사례로 덴마크의 머스크 라인(머스크)을 꼽을 수 있다. 지난 8월 16일(현지시각) 발표된 머스크 라인의 2분기 순이익은 4억3900만 달러. 지난해 같은 기간에 견줘 93% 늘어난 액수다. 전년 동기 대비 물동량 증가율이 2%에 그친데다, 평균 운임은 약 13% 하락했지만, 효율성을 높여 이익이 늘었다는 게 머스크 쪽 설명이다.
세계 최대 컨테이너 선사인 머스크의 선복량은 261만TEU가 넘는다. 게다가 6m 길이의 컨테이너 1만8000개(1만8000TEU)를 수송할 수 있는 세계 최대 컨테이너선박인 ‘트리플-E’를 올해부터 새로 투입하면서 효율성을 더 높였다. 머스크가 지난 2011년 대우조선해양에 발주한 트리플-E 20척은 저속 운항에 맞춰 설계된 친환경 컨테이너선으로, 기존 선박에 견줘 에너지 효율이 높고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25%나 줄였다. 머스크는 올해 4척, 내년 6척의 트리플-E를 주요 항로에 투입할 예정이다. 이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덴마크 정부가 머스크에 62억 달러의 금융 차입을 지원한 덕분이기도 하다.
머스크는 아놀드 피터 몰러가 아버지인 피터 머스크 몰러와 함께 1904년 중고 증기선 1척으로 설립한 해운사다. 코펜하겐에 본사를 둔 A.P. 몰러 머스크 그룹의 주력 기업이기도 하다. 머스크 그룹은 1999년 미국의 시랜드(Sea-Land), 2006년 영국·네덜란드의 피앤오 네들로이드(P&O Nedlloyd)를 잇따라 인수하며, 머스크를 전세계 컨테이너 선대의 약 15%를 보유한 해운업체로 성장시켰다. 머스크그룹은 글로벌 컨테이너 터미널 운영업체인 APM 터미널, 물류·운송업체 담코(Damco), 피더 선사인 MCC 트랜스포트와 사프마린(Safmarine) 등을 계열사로 거느리고 있다. 규모의 경제와 함께 수직계열화를 통해 해운 불황에 대응 가능한 경쟁력을 갖춘 것이다. 이와 관련해 김민지 이트레이드증권 애널리스트는 지난 9월 3일 열렸던 해운시황 전망 세미나에서 머스크의 향후 전략으로 규모의 대형화와 네트워크 구축을 통한 시장 지배력 강화, 그룹의 수직계열화에 따른 통합 SCM 서비스 제공을 꼽은 바 있다.
글. 이주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