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미국 발 글로벌 금융위기는 초호황이었던 해운시장을 장기 불황의 늪에 빠뜨렸다. 이에 따라 덴마크, 독일 등 주요 해운국 정부는 구조조정 및 금융지원을 동시에 추진하며 자국 해운기업의 경영정상화를 위한 정책을 추진했다. 우리 정부 또한 지난 8월 한진해운의 법정관리 신청 이후 한국 해운의 재도약을 위해 최근 “해운산업 경쟁력 강화 방안”을 발표하고 해운업계의 유동성 문제에 보다 근본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가칭)한국선박회사”를 설립했다. 하지만 해운금융을 담당할 신설회사 설립 이전에도 해운업 유동성 지원 프로그램인 “캠코(KAMCO)선박펀드”와 “시장안정 P-CBO”가 존재하였음을 감안하면 기존 해운금융 지원제도의 한계점을 파악, 보완한 제도 및 기관을 설립하여 보다 근본적인 해법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기존 해운금융 지원제도, 해운의 유동성 위험 대처하지 못해
한국자산관리공사(KAMCO)는 2009년 7월 구조조정기금을 활용하여 캠코선박펀드를 출시하면서 총 33개 선박투자회사를 설립, 총 1조 677억 원을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던 국적선사에 지원하며 선박은행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캠코선박펀드는 해당 선사가 계약 종료 시에 선박을 재 매입하도록 하고 있어 선박의 가격변동 위험이 아닌 해당 선사의 신용위험을 지는 해운금융모델로 평가되고 있으며 또한 유동성 지원의 대가로 채용선료를 지불해야 하는 금융비용이 발생하는 구조이다. 게다가 캠코선박펀드의 선박임대시 적용 금리는 최대 8.5% 수준이었는데 이는 위험부담을 지는 한국자산관리공사(KAMCO) 측에서는 불가피한 수준의 금리였지만 유동성 위기를 겪는 선사입장에서는 부담이 되는 수준의 금리라고 판단되어 해운 기업이 겪고 있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주지는 못했다는 아쉬움을 갖고 있다. 이 외에도 한국해양보증보험의 설립, KDB 선박펀드, Fast Track 등을 통한 해운금융 지원이 다양하게 이루어졌으나, 해운의 산업적 특성을 고려한 정책금융지원은 부족했다고 평가되고 있다.
해운의 산업적 특성에 기반 한 금융지원 체계 마련 절실
해운업 위기 극복을 위한 근본적인 해결책 마련을 위해서는 우선 해운의 산업적 특성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해운산업은 운임의 대폭적인 상승과 하락이 반복, 즉 높은 시장 변동성을 보이는데 반해 금융권은 우리나라 해운금융의 고유 특색으로 호황기에 고비용의 투자자금을 지원하고, 불황기에 신용경색으로 자금을 회수하여 국적선사의 유동성 위기가 반복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는 금융권의 해운산업에 대한 이해의 부재로 인한 것으로, 시황변동이 해운업의 본질적 특징임에도 불구하고 금융당국은 부채비율이 높은 해운기업의 재무 리스크를 일반 제조업과 동일하게 간주, 과대평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국적선사는 IPO(주식공개상장)나 증자를 통한 선박투자 시 초래되는 선주 지분 감소를 막기 위해 관행적으로 해외 선진국 선사에 비해 선박 투자 시 자기부담을 최소화하고 레버리지를 극대화하려는 경향이 있어 상대적으로 금융권 부채비율이 더 높은 편이다. 이에 따라 특히 불황기에 선가 하락 시 부채로 조달된 선박자금의 VTL(담보인정비율)이 감소하여 금융기관이 추가 담보나 대출금 조기상환을 요구해 선사의 유동성 문제가 더욱 악화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즉 금융권과 해운업계 간 산업에 대한 입장차가 시장의 효율적 자원배분을 막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해운금융 시스템에는 불황기의 유동성 문제에 대처하기 위한 수단으로 핵심자산 매각 이외의 대안이 없으며 이는 미래 시황 호전 시 수익 창출의 기회를 상실하는 현상을 초래, 장기적으로 봤을 때 우리 해운업계의 경쟁력 약화로 귀결될 수 있다. 실제로 IMF 구제금융의 여파가 채 가시기 전인 2002년 현대상선이 자동차 운송사업부를 매각하면서 유코카캐리어스가 설립되었는데, 이 때 매각대금으로 받은 금액이 1.4조원이었으나, 2002년부터 2015년 간 유코카캐리어스의 순이익 누적액이 1.4조원이었다. 즉 단기 유동성 압박으로 핵심 영업자산을 매각함에 따라 미래의 장기적 수익 창출원을 상실하는 불상사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악재를 막기 위해서는 해운시황의 변동성, 높은 자본집약도와 국적 선사의 과도한 차입경영, 단기 유동성 압박 해소책 미비 등의 해운업의 특성과 이에 내재된 금융지원 에로요인을 극복할 제도적 대안 마련이 중요하다. 특히 국내 1위 해운사인 한진해운의 법정관리가 진행되고 있는 지금이 해운기업의 위험관리 강화와 투자결정의 합리성 제고의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는 새로운 해운금융 시스템을 강구해야 할 시점이라 판단되고 있다.
2005년 해운경기와는 상관없이 법인세 납부액이 운항 선박량의 크기에 따라 결정되는 톤세 제도가 도입되며 해운투자의 합리성을 제고할 수 있는 제도적 여건이 부분적으로 마련되었지만, 여전히 해운투자의 합리성 제고를 위한 제도적 기반은 미약한 상황이다.
해운금융의 시장실패 요인을 고려한 정책금융 필요
업계 관계자 및 해운 전문가들은 또한 앞서 말한 해운의 산업적 특성뿐만 아니라 해운금융시장에 내포된 구조적 장애로 인해 시장의 효율적 자원배분 기능을 담보할 수 없는, 즉 시장실패가 나타나기 때문에 산업 정책적 차원에서 해운금융을 접근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들이 지적한 해운업의 시장실패요인은 정보 비대칭성, 해운 산업이 국민 경제에 가지는 외부효과, 다수의 이해당사자로 인한 조정실패의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 해운산업의 시장실패 요인인 정보 비대칭성 문제는 해운시황의 특성 상 해운기업은 불황기에 경쟁력 강화를 위해 낮은 선가에 전략적으로 일정 규모의 선대를 확보하는 경기 역행적 투자가 필요하지만, 이는 금융기관이 채택하고 있는 전통적 위험관리기법에서는 높은 투자 위험으로 인식되어 투자가 기피되고 있다는 것이다. 즉 해운금융의 대출자와 차입자라는 이해 당사자 간에 해운시장 전망을 해석하는 근본적 입장 차이가 있고, 이는 효율적 자원배분의 저해요소인 정보 비대칭성 문제로 귀결된다. 이러한 시장실패의 내재적 요인을 해소하기 위해 해운금융에 대한 정책금융기관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주장이다.
두 번째 해운산업의 시장실패 요인은 해운산업이 가지는 국민경제적 외부성에 있다. 해운기업이 자사의 경쟁력을 유지하면서 기업 활동을 영위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고용 및 소득을 창출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으로 확보되는 수출입화물수송의 안정성, 해상물류비용인하 효과 등은 개별 기업의 의사결정 시에는 고려가 되지 않는, 즉 우리나라와 같은 개방형 국민경제에서는 해운산업의 활동을 통해 수출입화주에게 제고되는 외부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만약 국적선사의 경쟁력 저하로 우리나라 국가경제의 외국적 선사 의존도가 커지게 되면 수출입 물류의 안정성 저하, 해상물류비용 인상 등의 외부 비경제효과가 발생할 개연성이 커지게 된다.
해운업 시장실패요인 그 세 번째는 해운금융의 이해당사자가 많아 산업발전에 적합한 해운금융기관의 설립에 필요한 이해관계 조정실패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해운금융의 가장 큰 수혜자인 해운기업이 원활한 자금공급을 받게 되면 자연히 투자자들도 투자금 회수의 불확실성이 낮아져 혜택을 받게 된다. 또한 화주도 앞서 언급한 해운산업의 외부성, 즉 수출입 해상운송의 안전성 제고 및 운임인하 혜택을 보게 되어 모두가 이득을 얻는 윈-윈 효과가 나오게 된다. 그러나 이들 이해 당사자들이 상호 합의하여 적합한 해운금융 기관을 설립하기에는 출자금 조정 등의 선결과제를 해결해야하는데 이를 해결할 가능성이 무척 낮다는 데 문제가 있다.
한국선박회사 설립으로 해운기업 재무구조 개선해야
지난 10월 31일, 정부는 “해운산업 경쟁력 강화 방안”을 통해 선박 원가 경쟁력이 취약한 국적선사 지원을 위해 선박 신조 지원 프로그램을 확대하고 한국선박회사를 설립하여 재무구조 개선을 지원할 계획을 밝혔다.
선박 신조 지원 프로그램은 기존의 자금 지원 규모를 1.3조원에서 두 배인 2.6조 원으로 확대하고, 초대형 고효율 컨테이너선 신조를 중점적으로 지원하되 벌크, 탱커 등 신조수요가 있는 기타 선박에 대한 지원도 병행할 계획이다.
정부가 설립할 한국선박회사는 산업은행, 수출입은행, 캠코 등 정책금융기관이 출자하여 선사 소유선박을 시장가로 인수, 선사에 재용선하는 소위 Sale&Lease-back 방식을 통해 선사의 재무구조를 개선시키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특히 선사의 취약한 재무구조 개선을 위해 판매 시장가와 장부가의 차이를 유상증자를 통해 자본을 공급하기로 하면서 선사는 원가경쟁력 확보와 재무구조 개선이라는 혜택을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정부는 이 같은 한국선박회사가 선사 정상화에 따른 주가 회복과 시황 회복에 따른 선박가격 상승 등 자본이득을 통해 용선료 이외의 수익이 확보 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있고, 아울러 선박투자자들이 선사와 함께 해운시황 변동위험을 분산부담하게 되어 선사들은 운영에 집중할 수 있게 되면서 해운산업의 전문화 촉진을 통해 우리나라 해운산업의 경쟁력이 강화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특히 한국선박회사는 정책금융이 지원하므로 앞서 언급한 해운금융의 시장실패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한국선박회사가 인수하게 될 중고선박의 선대 경쟁력 취약과 자산가격이 상승할 개연성이 낮다는 점에서 나타날 재무적 문제 등에 대한 개선책 마련은 아직까지 풀어야 할 과제로 남아있다.
해운업 자생력 제고 위한 동태적 자금축적 프로그램 구축
이번 정부의 대책은 불황 장기화에 따른 국적 선사들의 유동성 위기를 풀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으나, 해운산업의 자생적 자구노력 측면에서 보면 추가 대책이 필요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이다. 따라서 정부가 내놓은 해운대책이 업계의 자생력 강화와 지속가능한 제도로 안착하기 위해서는 “유동성 위기에 대비한 동태적 자금 축적 프로그램”을 마련해 장기적으로 한국선박회사의 기능 강화방안과 연계시켜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이들이 제시한 동태적 자금축적 프로그램의 기본구상은 호불황의 운임에 비례하여 평소에 자금을 축적하고 유동성 위기 시 자금부족에 대응하여 선박은행과 해운기업의 수익과 위험을 동시에 관리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이 프로그램이 작동할 수 있도록 향후 한국선박회사의 자금을 활용코자 하는 해운기업을 포함한 민간 이해 당사자의 자본 참여를 확대, 운영해야 할 필요가 있다. 즉 해운기업의 경우는 톤세 적용 논리를 준용하여 일정 기준을 만족하는 운항 선박량에 비례하여 매년 자본금을 출연하는 기업에 한하여 한국선박회사의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번에 발표된 대책이 해운산업의 경쟁력 강화로 이어질 수 있기 위해서는 국책금융기관과 연구원 등 전문가 집단이 협력하여 수요자 중심의 실효적인 조치를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