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에서 원유를 한국으로 수송하는 유조선이 반드시 지나야 하는 바닷길이 있다. 남중국(남지나)해와 안다만해를 연결하는 말라카해협이다. 남중국해가 태평양, 안다만해가 인도양에 속해 있으니, 말라카해협은 태평양과 대서양을 잇는 바닷길인 셈이다. 말라카해협은 예로부터 동아시아와 인도·중동·유럽을 오가는 무역선들의 통로 구실을 해왔다. 오늘날에도 이 해협은 중동산 원유를 한국·중국·일본으로 실어 나르는 유조선으로 붐비고, 수많은 화물선이 통과한다. 세계적 해운 요충지인 탓에 세계 항만순위 2위를 자랑하는 싱가포르항을 비롯해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의 주요 항만들이 말라카해협 연안에 자리하고 있다. 이번에 소개하는 포트클랑(Port Klang)도 말라카해협 덕분에 성장한 말레이시아 항만이다.
말레이시아 경제성장 도우미 포트클랑은 말레이반도 남서부 말라카 해협 연안 셀랑고르주 클랑(켈랑) 지역에 있는 항만이다. 두산백과는 클랑에 대해 “셀랑고르주를 통치하는 세습 군주인 술탄이 머무는 곳”이라 설명한다. 셀랑고르주의 “주도(州都)는 샤알람”이지만 “왕도(Royal Capital)라고 할 수 있”는 도시는 클랑이라는 것이다. 셀랑고르주 술탄이 사는 술탄궁전은 1974∼1977년 셀랑고르주의 주도였던 클랑에서 대표적인 관광지로 꼽힌다. 클랑은 말레이시아에서 손꼽히는 상업도시이며, 말라카해협으로 흘러드는 클랑강을 통해 말레이시아 연방수도 쿠알라룸푸르와 이어진다. 클랑 시내에서 서쪽으로 6㎞ 남짓 떨어져 있는 포트클랑에서 쿠알라룸푸르까지 거리는 약 40㎞. 자동차로 채 1시간이 걸리지 않을 만큼 가깝다. 때문에 포트클랑은 쿠알라룸푸르의 외항 대접을 받고 있다.
포트클랑을 포함한 말레이시아 항만은 모두 국가 소유다. 다만 누가 관리하느냐에 따라 연방정부 관리항만, 주정부 관리항만, 기타항만으로 나뉜다. 포트클랑은 페낭항·조호르항·빈툴루항·콴탄항·케마만항과 함께 말레이시아 교통부 항만국이 관리하는 연방정부 관리항만 가운데 하나다. 실제로 포트클랑 관리기관은 1963년 7월 1일 설립된 포트클랑항만공사(Port Klang Authority)다. 포트클랑은 말레이시아에서 처음으로 민영화된 항만이기도 하다. 한국해양수산개발원(KMI) 연구보고서를 보면, 말레이시아 연방정부는 “1980년대 중반 이후 ‘말레이시아주식회사’를 표방하며” 항만민영화를 추진했다. 그 첫 사례가 포트클랑이다.
1986년 3월 포트클랑항만공사는 포트클랑 내 4개 부두를 21년 동안 임대하는 계약을 KCT(Klang Container Terminals Bhn)사와 맺었다. 남항(Southport)과 북항(Northport)에서 직접 운영하던 부두시설과 예선·도선 따위 항만서비스도 1992년부터 KPM(Klang Port Management Sdn)사에 맡겼다. 1994년엔 공사 중이던 서항(Westport)의 컨테이너 터미널 등을 KMT(Klang Multi Terminal Sdn Bhd)사에 임대했다.
KCT·KPM·KMT 3개 기업은 2010년까지 말레이시아 항만기본계획에 따른 시설물 개발 선택권(옵션)까지 보유했었다. KCT와 KPM은 1995년 지주회사인 북항 말레이시아(Northport Malaysia) Bhd로 합병됐다. 현재 포트클랑 북항 컨테이너 터미널은 북항 말레이시아 Bhd사가, 서항 컨테이너 터미널은 KMT 계열 서항 말레이시아 Sdn Bhd사가 운영하고 있다.
포트클랑항만공사는 포트클랑에 대해 1993년 마련된 말레이시아 연방정부 지침에 따라 지역 거점(허브)으로 개발되고 있다면서 세계 120개국 500개 이상 항만과 연결된다고 밝혔다. KMI 항만수요예측센터(PDAC)는 “탄중펠레파스항과 더불어 말레이시아 경제의 중추 역할을 하고 있는 대표항만”이라며 포트클랑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탄중펠레파스항은 조호바루주 서남부 풀라이(Pulai)강 어귀에 1999년 10월 개항했다. 말레이반도 최남단 싱가포르항과 가까운 탄중펠레파스항은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항만이자, 포트클랑과 더불어 말레이시아 2대 컨테이너항만으로 꼽힌다. 코트라는 말레이시아 정부가 ‘화물 집중 정책’에 따라 포트클랑을 “전국 화물 물동량의 허브항이자 지역의 환적 중심항으로 육성하여, 가능한 말레이시아 내 지선 항만 역할을 담당하는 다른 항만들의 화물이 포트클랑을 통해 환적”되도록 하고, 탄중펠레파스항은 “말레이시아 남부지역의 환적항으로 육성 중”이라고 설명했다.
주요 시설과 컨테이너 물동량 항만수요예측센터와 코트라 조사 결과를 종합하면, 포트클랑은 쿠알라룸푸르의 외항으로서 컨테이너, 벌크화물, 원유 등 모든 화물과 여객까지 취급하는 총 54개 선석을 갖춘 다목적 항만이다. 말레이시아 전체 항만 물동량의 46%가 포트클랑에서 처리(탄중펠레파스 37%)되고 있다. 특히 23개에 달하는 포트클랑의 컨테이너 선석에선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많은 컨테이너를 처리한다. 포트클랑은 빽빽한 밀림으로 이뤄진 섬이 방파제 구실을 해준다. 프랑스 선사 CMA CGM 소속 대형 컨테이너선 ‘페가서스’를 타고 중국 상하이부터 영국 사우샘프턴까지 항해했던 기계비평가 이영준 계원예술대학 교수는 “컨테이너 야적장 너머로 도시만 끝없이 펼쳐진 다른 항구들과 달리, 포트켈랑에서는 컨테이너 야적장 너머도 끝없는 밀림”이라고 전했다.
포트클랑이 말레이시아의 ‘으뜸 항만’ 대접을 받는 까닭은 연방정부의 항만정책 탓이다. 인도네시아, 싱가포르와 함께 말라카 해협 연안국인 말레이시아는 싱가포르항을 견제하기 위해 포트클랑을 키웠다. 이웃 싱가포르가 해운업으로 부자나라가 되자 배가 아팠던 셈이다. 1993년 새 항만정책을 세운 말레이시아 정부는 1996년 포트클랑을 선적 센터로 지정했다. 말레이반도의 컨테이너 화물이 포트클랑에 모은 뒤, 최종 목적지까지 수송하기 위한 조처였다. 컨테이너 화물이 싱가포르항으로 유출되지 않도록 하면서, 포트클랑을 동남아시아 거점항만으로 육성하려는 포석도 깔려있었다. 더불어 포트클랑 배후지역을 자유무역지대(Port Klang Free Zone)로 지정했다. 1996년엔 서항을 개장하며 KMT사한테 33년간 임차권을 주었다.
포트클랑을 구성하는 남항·북항·서항 가운데 컨테이너 터미널은 가장 오래된 북항과 1996년 문을 연 서항에 있다. 남항은 벌크 화물을 주로 처리한다. 컨테이너 크레인 23기를 갖춘 북항 터미널의 총 선석 수는 12개(수심 11~15m), 선석 길이는 3070m다. 북항 터미널에 대해 항만수요예측센터는 “쿠알라룸푸르로부터 거리가 가까워 수출입관련 발생 비용이 서항보다 낮은 편”이라고 설명했다. 남항 터미널 면적은 89만㎡로 북항 터미널(93만4000㎡)보다 좁다. 총 선석 수도 11개뿐이다. 그러나 남항 터미널의 선석 길이(3700m), 수심(15~16.5m), 컨테이너 크레인 수(40기)는 북항 터미널을 앞선다. 이에 따라 대형 컨테이너선이 서항 터미널을 더 많이 찾고 있으며, 포트클랑 전체 컨테이너 물동량의 60% 이상을 서항 터미널에서 처리한다.
컨테이너 처리시간을 줄이기 위해 전자문서교환(EDI) 시스템(Port Klang Community System)을 갖춘 포트클랑은 2000년 320만TEU를 처리하며, 세계 컨테이너항만 가운데 12위를 차지했다. 453만3000TEU를 처리한 2002년엔 11위에 올랐다. 매년 높은 증가율을 보이면서 ‘세계 10대 항만’이란 명예가 눈앞에 다가온 것이다. 하지만 21세기 들어 컨테이너 물동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중국 항만들에 순위가 밀릴 수밖에 없었다.
2004년 12위(484만1000TEU), 2005년 14위(554만4000TEU), 2006년 16위(632만6000TEU) 등 포트클랑의 순위는 매년 내려앉았다. 그러다 2007년 16위(711만9000TEU)에서 2008년 15위(797만4000TEU)로 한 단계 올랐다. 세계 해운경기가 하락세로 돌아선 2009년 포트클랑의 컨테이너 처리실적은 731만TEU로 급락했지만 순위는 되레 14위로 뛰었다. 이듬해엔 887만TEU를 처리하며 13위가 됐다. 2011년(946만TEU)과 처음으로 1000만TEU를 돌파한 지난해는 12위를 지켰다.
포트클랑 자유무역지대의 힘
싱가포르에 이어 동남아 두 번째 항만으로 성장한 포트클랑의 장점 가운데 하나가 배후에 자유무역지대가 있다는 것이다. 포트클랑 자유무역지대(PKFZ)에 대해 현대상선 관계자는 “포트클랑의 강력한 경쟁무기”라며, “1000에이커 규모의 말레이시아 최초의 자유무역지대 및 공업지대 복합 기능 지역으로, 다국적 기업과 중소 제조기업, 물류기업 및 후방 근무 서비스업체들이 입주해 있다”고 밝혔다. PKFZ 개발 계획은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의 제벨알리 자유무역지대(JAFZ)를 운영 중인 제벨알리 자유무역청(JAFZA)이 세웠다. JAFZA는 PKFZ 시공까지 일부 맡았을 만큼 PKFZ 조성에 깊숙이 관여했다.
아세안 지역의 물류·유통·무역 중심지를 목표로 개발된 PKFZ는 포트클랑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두바이 제벨알리항만의 배후 자유무역지대를 본 따(벤치마킹) 만들어졌기 때문에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포트클랑과 연계한 동남아 물류거점으로 육성하기 위해 PKFZ 개발 계획을 세웠다. PKFZ 인프라 공사가 마무리 단계이던 2006년 당시 말레이시아 교통부 장관은 포트클랑을 동남아의 물류 중심지로 육성하려는 정부의 의지를 보여주는 게 PKFZ 개발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PKFZ는 포트클랑과 전용 고가도로를 통해 연결된다. 특히 포트클랑 서항과 PKFZ는 자동차로 10분이면 도착할 정도로 거리가 가깝다. 포트클랑 서항과 PKFZ는 모두 ‘풀라우 인다(Pulau Indah)’란 섬에 조성됐다.
항만수요예측센터에 따르면, PKFZ는 크게 경공업 창고시설(Light Industrial & Warehouse units), 산업용지인 PIL(Prepared Industrial Land), 비즈니스 단지(Business Complexes)로 나뉜다. 장단기 임대할 수 있는 경공업 창고시설은 제품을 조립하거나 보관하는 공간으로 활용 가능하다. PIL은 주로 다국적기업을 겨냥해 창고나 공장을 짓도록 장기 임대하는 땅이다. 비즈니스 단지는 8층 높이의 사무 빌딩과 전시 공간, 호텔, 주차장 등으로 이뤄졌다. PKFZ 사무실 겸 무역사무실이면서 전시회를 열 수 있는 곳인 셈이다. PKFZ에서 말레이시아 최대 소비지인 쿠알라룸푸르까지 거리는 약 70㎞이며, 쿠알라룸푸르국제공항과는 60㎞ 남짓 떨어져 있다.
한편, 포트클랑항만공사는 컨테이너 물동량 증가에 대비해 새로운 컨테이너 터미널 개발을 추진 중이다. 지난 2011년 포트클랑항만공사 회장은 2016년이면 포트클랑의 컨테이너 처리능력이 포화상태에 도달할 것으로 보인다며 북항과 서항에 이어 세 번째 컨테이너 터미널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그는 당시 포트클랑항만공사가 관리감독을 맡고 민간 기업이 운영하는 새 컨테이너 터미널을 민간투자 방식으로 서항 인근에 마련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포트클랑항만공사는 ‘21세기 환적 컨테이너 터미널(21st century transshipment container terminal)’이란 요구에 맞춰, 서항의 컨테이너 처리능력을 1400만TEU까지 늘리기 위한 터미널 확장 공사를 2016년까지 마무리하겠다고 홈페이지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글. 이주현 기자